라죠자연보호구 소회 (1)
참새
벽돌로 만들어진 잿빛 실루엣 건물의 옆 출입구를 뿌연 알전구가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출입문의 옆 조그만 공간에는 여름이면 제법 무성할 깃꼴 겹입의 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고, 전구의 옅은 빛은 나무의 한쪽만을 비추고 있어 나무의 푸근함 보다는 긴장감의 끈을 살며시 조여 오는 듯하다. 그날, 2008년 9월 20일 추석의 여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야생동물 길라잡이 심화과정으로 떠난 러시아 라죠자연보호구 연수일행 12명은 그렇게 극동러시아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하였다.
오전 07시까지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모이기로 하였기에 00시30분 심야버스를 타고 올라가면서, 내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러시아에 대한 나의 지식은 닥터 지바고, 라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같은 한편의 영화 속 장면이 전부일 만큼 거의 전무했다. 물론 러시아 극동지역을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정보를 얻고자 해 보았지만, 사돈의 팔촌 묘를 벌초하듯이 한터라 가서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씩씩한 심야버스는 고맙게도 예정된 시간인 05시 30분에 정확히 공항에 도착한다. 당연히 길동무들은 아무도 없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올라 온 채송화쌤이 이것저것 주섬주섬 먹거리를 꺼내어 놓는다. 덕분에 허기를 면하기 위해 허급지급 먹지 않아도 되니 고마운 마음 가득하다.
약속된 시간이 되어가자 일행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들 이른 시간에 부스스한 얼굴이지만 웃음들이 가득하다. 반갑게 인사들을 나눈다. 정확히 07시에 얼레지가 나타났다. ‘어찌 시간을 저리 맞추었을꼬’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왕피천과 나무늘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통역관이자 교육가이드 역할을 할 영준쌤도 아직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공으로 가는 수화물 수속을 한 시간은 0730분.. 미처 도착하지 않았던 쌤들이 나무늘보를 끝으로 다 모였다. 09시에 떠나기로 되어있던 비행기가 연착되어 12시에 떠난단다.
작은뿔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비행기 뜨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
모두들 아침들을 먹지 못해 시장한 터에 얼레지의 주도로 즉석 사다리타기가 이어지고 나는 당첨금으로 3000원을 내어 놓아야했다. 떡이 오고 우유랑 음료가 오고.. 흥겹게 먹고 얘기하니 금새 배가 불러온다. 기다리는 시간동안 아이쇼핑이라도 하자는 의견에 모두 출국장내로 들어간다. 먼저 심사를 마친 후 일행을 기다리자니 작은뿔님이 오시지 않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선생님의 선식이 규정에 위배되어 인삼선식을 한꺼번에 다 마시고 오셨다는 얘기에 모두들 ‘아이고..’
11시까지 블라디보스토크 탑승구 앞에서 모이기로 한 후 각자 그룹을 지어 뿔뿔이 헤어진다. 탑승수속은 1145분에 시작되었다. 탑승객들은 거의 백러시아계 사람이였지만 몽고계통의 이국인들도 드문드문 보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쪽 잡아 째진.. 길라잡이일행12명도 탑승객대열에 끼여 있었다. 1225분에 블라디보스토크항공 비행기는 이륙했지만 상승하는 도중에 몇 차례 난기류를 만나 모두들 간이 콩알만 해 진 표정들이다. 창공에서 바라보는 삶의 터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아쉽게도 좌석은 날개를 바라보는 18B!
비행기를 타면 오른쪽 좌석에 앉아야 한다던 옆의 작은뿔님과 보리쌤도 살짝 실망한 눈치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리나라의 시차는 2시간, 시계를 돌릴까 하다가 그냥 두고 보는 것도 괜찮겠다싶어 그냥 두었다.
2시간여의 비행 끝에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착륙한 시간이 내 시계로 1415분! 이곳 시각으로는 1615분이다. ‘이제부터는 시간 쓰는데 신경을 써야지’
착륙하기 전에 날개사이로 보이던 하얀 자작나무 숲이 눈에 들어오니, 비로소 여기가 러시아땅이구나 싶다. 비행기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는 얌전히 앉아 있어 라는 러시아 방송이 나왔음직 한데, 모두들 벌떡 일어나서 짐을 찾아 줄서는 모양새가 우리나라 풍경과 다름이 없어 웃음이 난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서 공항본청까지는 불과 20여 미터. 그래도 차량탑승후 이동하는 것이 이채롭다. 출국장에서 타고 온 비행기를 촬영하려고 하니 중년의 공항여직원이 제지한다. 출국심사대 직원의 그 경직된 모습들은 세계 공통인 듯 하여 씁쓸해 졌지만, 각자의 짐을 찾고 밖으로 나오니 길동무들을 6박7일 동안 안내해 줄 한분인 인나박사의 그 화사한 웃음에 불편한 마음들은 눈 녹듯 사라진다. 마담이라 칭하며 여성분들께 안기는 크고 환한 꽃다발은 경쾌한 민족성을 느끼게 하고, 그 모습을 보자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공항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도요타 승합차 2대에 나누어 탄 후, 라죠자연보호구 사무실로 향한다. 가다가 잠깐 휴식하더라도 5시간은 달려야 한다니.. 꽤 먼거리임에는 틀림없다.
2시간 정도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연이어 달려 1830분에 도착한 곳은 국도 옆에 위치한 작은 패밀리 식당이다. 안쪽으로 안내받아 들어가니 홀에는 가족단위의 러시아인들이 가득하다. 예쁜 아이들의 그 희고 뽀얀 피부색에 찬탄을 내 뱉는다. 식사하는 러시아인들도 우리 일행이 신기한 듯 식사하며 힐끗힐끗 쳐다본다. 물론 아이들은 말 할 것도 없다.
연어까스와 수프가 주메뉴였는데 느끼함으로 말하면 수프가 더하다. 러시아 맥주와 음료로 모두들 건배를 하니 창밖으로 보이는 코스모스도 바람에 한껏 흔들린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량에 탑승한 시각은 1910분. 차장으로 보이는 낮은 산에는 자작나무과의 나무들과 신갈나무가 주종인 듯 보인다. 왕복 2차선 길가로는 버드나무들과 단풍이 든 싸리나무가 눈에 들어오니 어쩐지 눈에 익은 풍경이다. 우리나라 제주도 산간도로를 닮았다.
얕은 강이 나타나고 강 곁으로 놓여있는 철도가 한가로운데 로켓을 닮은 전신주에는 까마귀 몇 마리가 까악거리고 있다. 넓은 초지에는 마타리 군락들과 키가 큰 지칭개 군락들이 바람에 할 일없이 흔들리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하얀 자작나무들과 넓은 초지만이 여기가 러시아라는 사실을 일깨워 줄 뿐..
차량으로 이동하는 내내 인나박사와 영준쌤이 담소를 나누더니.. 피곤한 영준쌤이 어느 새 곪아 떨어진다. 인나박사는 여전히 꼿꼿하다. 시나브로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고 차량에도 미등이 켜진다. 어둠이 내린 도로 곁의 목조주택들은 맞배양식에 슬레트 지붕들을 얹히고 있어 도시를 벗어난 시골풍경은 더욱 이국적으로 다가온다.
1946분, 여전히 차는 달리고 있고 ‘실브르빠스’라며 청춘남녀의 소원을 그리 크지 않은 관목줄기에 천으로 매달아 놓은 장소를 지난다. 문득 남산을 올랐을때 난간에 메달아 놓은 자물쇠들이 떠오르며 ‘청춘남녀의 열기는 국적이 따로 없구나’ 싶어 웃음이 난다.
산이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산간도로로 접어든다. 여기저기 참나무겨우살이들이 눈에 띤다. 드문드문 마주 오는 차량들은 뽀얀 흙먼지를 달고 쏜살같이 비포장길을 잘도 달린다.
한적한 비포장도로 곁에 위치한 주요소에 정차한 시간은 2018분. 험한 길을 한껏 달린 승합차가 꿀꺽꿀꺽 마시는 기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30분쯤 달려갔을까? 인나박사가 여지것의 비포장도로는 러시아의 국도였지만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험로라고 말하며 주의를 당부한다. 시간을 보니 20시46분이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계속해서 일렁인다. 험로라는 이유를 이제야 알아챈다.
그렇게 도착한 라죠자연보호구 관리사무소 건물은 어둠속에 가로등 불빛을 받고 있는 벽돌로 만들어진 잿빛 2층 건물이였다. 얼른 시간을 확인하니 2130분이다.
모두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2층의 게스트룸으로 남자분들은 단체로 배정받고 여자분들도 2인 1실로 2개의 방을 배정받았다.
짐을 옮긴 후 밖으로 나와 보니 신선한 대기가 온 몸을 감싸고 나도 모르게 쉼호흡을 한다. 허파꽈리가 빵빵해 질 때까지..
관리소 1층 한귀퉁이 표본전시실에서 잘 만들어진 박제들을 보며 공부한 내용은 나 말고 다른 분들이 올릴 것을 기대하며 생략한다.
어쨌던 귀하고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23시30분에 박제박물관을 나선다. 숙소에서 여장을 정리한 후 모두모여 영준쌤이 준비한 데킬라 축배를 마신다. 흥겨움과 기대감이 넘쳐난다. 그렇게 러시아에서의 첫날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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