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죠자연보호구 소회(2)
넓은 초지위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나는 식은땀을 연신 흘리고 있었다.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지만 지금의 다급한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몇 그루의 나무만 보일뿐.. 멧돼지는 작은 눈을 치켜뜬 채 이미 안전거리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날카롭게 히번덕거리는 눈동자엔 살기가 등등하고 고함을 질러야겠다는 것은 마음뿐.. 나는 사지가 얼어붙은 채 꼼작달싹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득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멧돼지가 나의 엉덩이와 사타구니에 코를 박아 넣고 냄새를 맡을 즈음엔 나는 기절 일보 직전이였고, 팔하나를 내어주어 미끼로 삼더라도 녀석의 급소를 일격에 노려야 한다는 일념만이 온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 절대절명의 순간.. 멀지않은 초지의 풀숲에서 발굽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멧돼지는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나 역시 뒷걸음을 쳐서 안전거리를 확보한 후 ‘걸음아 나 살려라’ 냅다 뛰기 시작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커다란 사슴뿔이 내 곁을 지나 숲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뒤를 어미와 새끼인듯한 사슴들도 뒤따르고 있었고.. 그제야 ‘아..! 말사슴 가족이 날 살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팽팽했던 사지에 힘이 쪽 빠지면서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이때 멀리서 장닭의 횃치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속에 길동무들의 다양한 숨소리들만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꿈이였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며 실제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두근거리는 가슴이 화장실을 다녀와서도 쉬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어둠속에 방안의 사물이 눈에 익을 즈음에 그림쌤이 일어나신다. 모두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간밤에 흥겨운 시간을 보낸 후 짐들을 꾸리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막간을 이용하여 다시 배낭속의 내용물들을 점검하느라 부산하다. 오늘부터 3박 4일 동안은 야인으로 생활을 한 후 4일째 늦은 시간에 다시 이곳 라죠사무국으로 복귀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일정들이다. 간밤의 부푼 바램들이 사치스런 기대가 되지 않기를..!
우리 일행은 레인져분들이 라죠산림보호구를 순찰할 때 타는 러시안짚차 2대에 나누어 탑승한 후 라죠보호구역으로 출발한다. 키예프강을 따라 비포장 길을 질주하니 뽀얀 흙먼지와 구름이 낮게 걸려있는 황홀한 풍광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동이트기 전 출발한 짚차의 차장으로 어느 새 햇살이 피어오르고 나무사이로 퍼져오는 햇살의 간지러움에 모두의 얼굴엔 행복감이 밀려온다.
라죠보호구역내 서식하는 시베리아호랑이 개체수는 카메라 트랩으로 확인 된 10마리 외에 2~3마리 가 더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태어나는 개체수는 이보다 더 많지만 라죠보호구역내의 서식밀도가 한정되어 있어, 어린 개체들은 독립할 시기가 되면 보호구역을 벗어나서 스스로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밀렵으로 인해 보호구 내의 개체들보다 생존 가능성은 급격히 낮아진다. 년간 60~100여 마리가 밀렵으로 희생되는 것으로 추증된다고 하니 밀렵으로 인한 야생동물의 폐해는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심각한 모양이다. 라죠보호구역으로 가는 길목의 한 작은 마을엔 노인의 절반은 밀렵으로 생계를 삼고 있다하고, 그런 마을들이 보호구 외곽에 몇 개가 더 있다하니 규모에 의한 밀렵의 심각성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렇게 아득한 마음 한켠에는 그 많은 밀렵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자연보호구 생태계의 건강성이 더욱 궁금해진다. 휴식을 위해 잠깐 정차한 마을에서 젖소의 젖을 짜는 아낙에게 작은바람님이 우유를 사는 동안, 나는 맞은편 집에 사시는 러시안할머니 한분이랑 바디랭귀지로 대화를 나눴다. ‘아이고..눈이 쪽 째진 사람들이 어디간다고..그리 가 샀노?’ ‘예.. 할매요. 호랑이 볼라고 한국에서 왔심니더’ ‘아이고.. 이 사람들아! 호랭이한테 물리가지나 말거라’ 얼마를 달려갔을까? 도요타승용차가 길 옆 숲속으로 쳐 박혀 있고, 얼굴에 피칠갑(?)을 한 운전수와 남녀 경찰이 우리일행을 급히 세운다. 차를 빼야 되는데 도와달라는 눈치다. 운전하시던 레인져분이 끈을 엮어서 연결한 후 후진하며 서서히 당겨보지만 팽하고 끊어져 버린다. 이때 영준쌤이 끈을 짧게 만들어 다부지게 차량에 엮는다. 러시안 짚차가 다시 힘을 내니 나무에 걸린 범퍼는 떨어져 나갔지만 승용차는 길 위로 수월하게 올라온다.
모두들 기분좋게 웃으며 뽀얀 흙먼지를 달고 달린다. 러시아 영토이지만 극동의 변방이라 그런지 국도라고 하는 것이 거의가 비포장도로다. 그나마 노면에 패인 곳이 적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이였다. 그렇게 달려서 0940분에 도착한 곳은 과거에 꽃사슴농장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자갈과 모래가 섞여 있어 해안선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올레니아 보트’라는 휴양시설이 있는 숙영지였다.
빵과 요거트와 계란후라이, 밀크와 티로 늦은 아침을 먹은 시간은 1000경이였다. 아침을 먹은 후 엉덩이 붙힐 틈도 없이 멀리 바다에서 보트 두척이 해안선으로 다가온다. 우리 일행을 태워 페트로버섬에 있는 주목 군락지로 가고자 함이다. 선장을 포함한 7인이 한배에 승선한 후 출발한다. 앞선 보트가 출발한 후 우리가 뒤를 따르는데.. 출발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앉아있던 알렉산더박사가 벌떡 일어서더니 ‘고래’ 라고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연신 앞바다를 가르킨다. 모두들 ‘어디어디..’ 하고 북새통을 치는사이 밍크고래가 유유히 등지느러미를 보여준다. 모두들 숨을 죽인다.
섬에 도착한 후 앞선 일행들에게 고래를 봤다고 열띤 얼굴로 자랑했더니, 해당화 군락 앞에 앉아있던 우리의 영준쌤..! 사진증거를 보여 달란다. 그러나 밍크고래가 우리의 눈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동철쌤이 사진을 보여준 직후인 1100 정각 이였다. 모두들 흡족한 마음이 되어 주목군락지로 접어든다. 굵고 다양한 형태의 주목들은 말갛고 빨간 열매를 달고 있다. 허나 정작 나의 시야를 사로잡았던 건 아주 큰 교목의 엄나무 개체였다. 우리나라에도 음나무들이 많이 자라지만 저렇게 큰 개체는 드물지 않나 싶었다. 코르크질의 수피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속살이 노란 황벽나무, 가지런한 잎사귀가 단정한 까치박달나무, 쭉쭉 벋은 기상이 예사롭지 않은 전나무, 껍질에 기름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눈밭에서도 불쏘시게 역할을 한다는 물박달나무, 러시아의 대표종인 숲속의 요정 자작나무, 우리 산야에도 많이 보이는 산벚나무도 보였고, 잣나무, 신갈나무, 개암나무, 야광나무, 진달래 등등이 보였다. 뿌리덩이가 사약의 재료가 되었던 투구꽃 군락들이 잘 형성되어 있었고 바닷가 해안쪽으로는 해당화군락과 함께 둥근바위솔 군락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다시 보트에 승선하여 올레니아 보트로 돌아오던 중에 밍크고래가 유영하는 모습이 눈에 잡혔고, 2호 보트에 승선한 우리 모두는 경탄하며 고래의 뒤를 한참을 밟는다. 그 사이에 참새는 밍크고래의 등지느러미 촬영에 성공.. !
숙영지로 돌아와서 쌀밥과 연어국, 명태조림, 돼지고기믹스부침, 오이조각, 토마토, 양배추, 메이플시럽으로 맛난 점심을 먹는다. 모두들 오늘 나타난 고래얘기로 분위기가 흥겹다. 30여분의 식사시간이 지난 후 오늘 묵을 잠자리를 배정받았다. 예상했던 대로 올레니아 보트내의 그림같은 방갈로인데, 바다가 바로 바라다 보이는 환상적인 숙소다. 여성분들이 방갈로 하나, 영준쌤, 안개소년, 나무늘보, 금강송이 또 한 방갈로 참새와 쉬리와 왕피천과 그림쌤이 마지막 방갈로에 여장을 풀었다 (참고로, 방배정은 잠자리의 고약함으로 배정했다나 어ㅉ데나..ㅎㅎ)
이어지는 자유로운 사색의 시간.. 모두들 방갈로의 테라스로 나와 한폭의 그림이 되고, 느릿느릿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열심히 한 것 없는 내가 너무 호사를 누린다. 깔깔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안개소년과 보리쌤이 ‘에딕’과 함께 주먹속의 보물찾기 놀이에 열중하며 내는 소리다. 이곳 휴양지의 식당과 매점을 운영하는 러시아인의 어린 아들인 에딕은 손을 뒤로 돌려 주먹속에 보물을 숨겨서 앞으로 쭉 내민다. 안개는 고심고심하다 왼손을 가르키고.. 곧 이어 주먹을 펴 보이며 깔깔거리는 머릿결이 노란 아이의 맑은 웃음이 고요한 해변의 햇살 타고 창공으로 퍼져 오른다.
주섬주섬 카메라와 노트를 챙겨들고 왕피천과 함께 작은뿔님과 영준쌤을 따라 나서니, 이곳저곳 쑤시며 다니던 얼레지가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 왔다. 휴양지 서편 해안을 살펴 볼 참인데 오전에 다녀온 페트로버섬 방향이다. 바다로 흘러드는 차가운 냇가에 다다르니 물총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참하게 앉아 먹이를 노리고 있다. 모두들 카메라 앵글을 맞춘다.
냇가 모래사장에 찍혀 있는 수달의 흔적을 살펴본 후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냇가를 건너가니 10대로 보이는 러시안 친구 3명이 담배를 피고 있다 다가오는 우리를 발견하곤 눈치를 살핀다. ‘잉..! 머리에 피도 안 마른놈들이..’
해안가에서 조금씩 멀어지자 암석길이 나타난다. 자작나무 몇 그루가 낙석과 함께 쓸려 넘어져서 힘겨운 생존을 하고 있다. 모두들 다시 신발을 신는다. 돌들이 너무 뽀족하다. 갯가 야생화들이 바위틈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어 나비와 풍뎅이, 파리들이 한껏 신이 났다. 얼마를 갔을까? 빨갛게 녹이 슨 배의 잔재가 해안가에 방치되어 있고, 녹슨 철판 넘어 보이는 해안 방갈로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해안 암벽 모퉁이를 돌아 갈 즈음 왕피천이 손으로 바다를 가르키며 ‘고래다’ 라고 외친다. 모두들 긴장모드로 전환한 채 바다를 응시하니, 서서히 드러나는 밍크고래의 등지느러미..! 연신 셔트를 눌리며 밍크고래를 촬영하다 고개 들어보니, 모두들 행복해하는 모습이 어린 아이의 표정과 다름없다. 배를 타고 가지 않아도 고래를 볼 수 있는 이곳 극동러시아 라죠보호구는 진정 야생동물 길라잡이들에겐 천국에 다름아니다. 고래의 자취가 멀어진 후 오바스니섬 해안암반에서 가마우지가 날개를 말리고 있는 뒤편으로 물범이 나타나 우리의 눈을 또 즐겁게 한다. 그렇게 한참을 바다를 보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햇살이 느릿하게 서편으로 기울고, 우리는 왔던 길을 뒤돌아 나온다. 해안 암석길을 지나 모래사장으로 접어드니 파도가 쓸려오는 모래사장위에 멸치떼가 밀려와 은빛 몸체를 파다닥거리고 있다. ‘아이고.. 이기 왠 횡재고!’ 비닐팩에 멸치들을 가득 주워 담은 후 걸음을 옮길려니 또 다른 파도에 밀려오는 멸치떼들.. 줍다줍다 지친 우리의 영준쌤 ‘아따.. 징허네. 도대체 가들 못하게 허네’ 그렇게 맨손으로 멸치떼를 수확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방갈로로 돌아와서 주방에 던져 주니, 저녁시간에 멸치가 큰 물바가지속에 가득 담겨서 통째로 밥상에 올라왔다. 아껴 두었던 고추장을 꺼내 소스로 하고 멸치를 손으로 잡아 고추장에 푹 찍어 한입에 넣으니 맛이 일품이다. 영준쌤과 참새가 맛나게 먹는데 다른 분들은 도대체 먹지를 않는다. 내장을 꺼내지 않아 씹을 때 약간 씁스레하긴 하지만, 이 맛 나는 걸 왕피천도 먹질 않으니.. 얼레지가 용기내어 고추장을 찾는다. ‘빙어 맛하고 똑같아’ 라고 자기암시를 한 후 정확히 러시아산 생멸치를 5마리 먹었다. 헤헤.. 다른 분들은 여전히 먹을 생각이 눈꼽만치도 없는 표정들이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평온한 심신을 파도소리에 내던진다. 2000경에 해가 빠졌으니 식사후 얼마 있지 않아 별들이 동편하늘가로 떠 오른다. 여행채비를 꾸릴 때 별 점사촬영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별이 하나 둘씩 올라오니 마음이 바빠진다. 모두들 해안가에 침낭을 들고 나가 별빛 샤워를 할 모양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해변으로 나간다. 작은뿔샘은 아예 한둔하러 가시는지 메트를 들고 나가신다. 나는 별을 담으러 삼각대를 들었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막히게 2200 정각에 방갈로의 모든 불빛이 꺼진다. 두런거리던 말소리도 잦아들고.. 깊은 정적속에 아름다운 풀벌레소리와 별빛만이 온 대지에 황홀하게 피어오른다.
그 밤.. 참새는 별빛속에 하현달을 끌어안고 깊은 잠이 들었다.
덧글: 페트로버섬과 오바스니섬.. 우리가 간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혼선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