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았다.
나를 쳐다보는, 우리를 쳐다보는 물범을,
메뚜기를, 삵의 똥을,
사마귀가 막 껍질을 벗고 태어나는 것을,
건빵을 무시하는 육식동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탓쥐를,
나는 들었다.
물범이 올라오며 콧구멍으로 바람을,
한밤,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풀벌레를,
나는 맡았다.
비온 뒤 멧돼지의 질퍽한 똥을,
말라버린 냄새없는 삵의 하얀 똥을,
3일을 같은 옷을 입고 나는 자연의 냄새를,
나는 맛보았다.
멧돼지가 한참을 즐겼을 조릿대를,
어린 고라니가 냠냠 먹고 건강하게 또로록 싼 똥을,
나는 느꼈다.
물고기를 물고 간 수달의 기쁨을,
산속에 난 2차선 도로를 우리 차의 소리와 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 한 밤중의 깜깜함을, 그리고 그 산 속에 정말 호랑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을,
이른 아침에 햇볕으로 깨어나, 저기 산짐승도 나와 같이 깨었다는 것을,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흔한 문구가 진실임을, 힘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살아있었다. 살아있는 것. 그것들에 설득당했다.
과연 내가 그 누군가를 설득시켜 함께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 들던 중에 최태영선생님께서 양기씨와의 인터뷰를 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얼핏 보았다. 이런 말씀을 하시던 중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자연, 환경 보호에 일단 관심을 가지고 뜻이 있으신 분들이라 이해도 쉽고 …..” . 일단, 고민 한가지는 접었다. 저렇게 &'빠삭하신 분&'도 일반인을 설득하기 어려운데, 내가 무슨 고민이야? 결코 지식과 정보가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런 점은 그동안 과정 속에서 들어온 환경보호와 지역주민간의 이해, 갈등에서도 엿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21세기의 키워드는 감성이라는 일종의 마케팅적 정의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그것이 호감으로 받아들여지든, 비호감이든 일단 그 논쟁은 접어두고.
진실한 감동만이 다른 이를 설득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답을 얻었다.
작게나마 나의 홈페이지에 내가 보고 온 것들을 살짝 올려놓았다. 또 만나는 이들에게 나의 이 행복충만을 털어놓았다. 이것으로 시작이다. 나는 '시나브로'라는 말이 좋다. 언젠가 이렇게 시나브로 시작된 그들과 자연의 인연도, 한번쯤 고민하게 되는 때가 오겠지. 왜 내가 “삵의 발바닥을 보았다” 로 메신저 로긴을 하는지. 왜 백령도를 다녀와 “근래 본 얼굴 중에 제일 환한 얼굴이네. 계속 웃고 있잖아.”와 같은 인사를 듣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그런 때가 오겠지.
이제, 나의 감성사전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 백과사전이 아닌 감성사전이 두터워질 수록 진심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나와 당신(읽는이가 어린이든, 또래이든)이 될 수 있겠지.
얼레지 감성사전.
어린 고라니의 똥- 어린 고라니가 풀을 먹고 소화시킨 다음의 배설물. 어린 고라니의 똥은 어미 고라니는 아기의 배설을 기다려 주고, 아기는 어미 옆에서 편안한 맘으로 똥을 눈다. 똥을 누기 위해,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데, 똥그란 똥이, 똥또똑 똥똥 거리고 떨어지면 아기 고라니는 기분이 좋아진다. 어미 고라니는 아기를 쳐다보고는 다시 앞장을 선다. 아,아기고라지똥은 마른 풀, 볏짚과 같은 맛이 난다.
행복-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고둥의 자리이동을 10분은 쳐다볼 수 있는 것. 한 놈, 두 놈의 길이 커다란 그림으로 보이는 순간.
반전- 하루종일 해양생물들에 대한 애정을 싹틔우고자 노력하고 물범을 눈앞에서 보며, 그들의 눈동자에, 콧구멍에 반해 연신 감탄을 하다가, 해수욕장에서는 발가락으로 모래를 탐사하며 조개를 주어 야밤에 숯불에 구워, 그것도 날것은 위험하다며 바싹~~ 익혀 냠냠 먹는 것. ^^::
감탄사 '아' – 백령도의 어느 마을길에서 과학책에서만 봤던 달의 모습을, 필드스코프를 통해 볼 때 나오는 감탄사. 달의 황금색과 어두운 우주의 빛을 양점으로 나타나는 그라데이션을 보면서도 나올 수 있다.
우리-
지리산, 설악산, 백령도를 오가며 함께 발견한 우리의 자연, 나눈 이야기들, 각자가 품은 것들…버리기 위해 채우고, 채우기 위해 버리는… 2008년 여름이 나를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