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후기] 지리산, 깊은 기쁨

2008년 8월 25일 | 야생동물길라잡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깨고 떨리는 마음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공주에서 대전, 대전에서 남원,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화엄사로 가는 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남원, 혼자 야채토스트를 먹으며 화엄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기 멀리 어디서 본 듯한 분이 계셨는데 그 땐 안경을 안 쓰고 있어서 몰랐다.
잠시 후 그분이 오셨는데, 아, 알고보니 나무늘보님이였다. 아하, 반가워서 이야기하다 곧 화엄사로 가는 버스를 탔다.

1시간 즈음 지나고 화엄사에 도착해서 산채비빔밥을 먹고 사람들을 만났다.

지리산 국립공원의 교육공간을 구경하고 직원분의 이야기를 듣고, 야생동물종복원센터에 갔다.
야생동물 종 복원… 평소에 관심이 너무 많아서 잔뜩 기대가 되었다.

도착하자 마자 우리 보돌이 같이 생긴 커다란 개가 있었다.
풀려있었는 데 나름 견생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반달가슴곰이 있었다. 동물원에 비해 넓지만 그들에겐 너무나 좁은 우리였다. 천왕이….

어렸을 때 지리산에 방사 되었다가 탐방로를 걷는 관광객들이 귀엽다고 먹을 걸 너무 많이 준 게 문제가 되어 3년 후 다시 회수된 야생을 잃은 반달가슴곰 천왕이. 군것질에 이빨이 20개가 썩어 임플란트 이야기까지 나왔었다.

지리산에는 야생 반달곰이 5마리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대로 두면 20년 정도 후면 멸종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시급했기에 시작한 복원, 하지만 복원이라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야생동물의 종을 복원하는 데에 있어서는 해결해야 할 3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한다.
원종 확보, 서식지 확보, 그리고 인간과의 문제이다.

곰이 인명피해는 일으키지 않는 상황이라지만 한해에 무수한 농작물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곰이야 원래 자신들의 영토에 있는 손 쉽게 구할 수 있고 맛있는 꿀과 농작물을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피해를 전액 보상하고 있는 나라지만 언제까지 등 돌린 농민들, 어떤 공존도 양보도 생각하지 않는 주민들을 상대로 그 어마어마한 액수를 지불해 줄까. 이미 주민이 등을 돌린 상태에서 공존을 외쳐보아도 소용이 없는 것일까.
원래부터 지리산에 살고 있었던 반달가슴곰이 아니라,
정부에서 복원한답시고 풀고 피해를 일으키는 그런 골칫덩이 곰으로 인식되는 건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복원, 그 성공은 무엇인가?

지리산 반달가슴곰이 방사된 개체 16, 야생개체 5… 21마리로 예전보다 많은 수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동물을 잡으려고 쳐 놓은 올무에 걸려 죽기도 하는 곰들을 보면 사람들이 잡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21마리도 200마리도 의미없는 수는 아닐까.

곰 한마리당 농작물 피해보상액이 상상을 초월하는 데… (건드리는 녀석들이 계속 건드리는 걸 수도 있다지만)

이렇게 작은 곰조차도…
사람에게 위협을 주지도 않고, 그저 꿀을 먹는 것 뿐인 곰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일까.

하지만 모두가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착하고 나쁜 건 없다. 농민들, 사람들, 모두를 안고 가야하겠지. 모두를 이해하자.

우리 겨례 속에서 곰이 주는 의미와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위치와 역할뿐 아니라,
우리의 넓은 가슴과 원래 그 자리에 존재했던 곰을 위해
우리 모두가 조금만 더 나 아닌 존재를 향한 너그러움과 당장은 피해를 보더라도 win-win의 공존을 추구해 볼 수 있음 좋겠다.

이러저러 생각을 하고 종복원센터를 둘러보았다.

전파 발신기와 추적에 대해서도 이야기 듣고, 곰의 신기한 점도 이야기 들었다.

동면을 하면서 3-4개월을 먹지도 싸지도 움직이지 않고도 아무 이상없는 신기한 곰.
여름에 수정란이 생기면 바로 착상을 하지 않고 늦가을 동면이 가능하면 착상을 시키고 불가능 하다고 여겨지면 착상하지 않고 자연 유산을 하는 놀라운 곰의 신비~
세상엔 참 신기한 것도 그로부터 배울 것도 참 많구나.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갔다.

그리고 저녁에는 최태영 선생님의 야생동물과 흔적이라는 주제의 강의가 있었다.

흔적, “인류가 읽기 시작한 가장 오래된 문자는 발자국이다”라는 시튼의 말을 들려주시며 정말 재밌게 강의해주신 선생님.

진화적 관점에서 본 동물들의 발바닥 이야기도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그 밖의 동물 이야기들도 다 너무 재미있었다.
항상 보아 온 개 발바닥과 발자국, 고양이 발바닥과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신기했다.
개는 고양이에 비해 발을 특별한 용도없이 달리는 데에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좌우대칭형으로, 주로 앞발로 사냥을 해 왼발 오른발 구별이 확실한 고양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 일상생활에서도 이렇게 생각해 볼 게 많고 재미난 과학이 숨어있구나.

또 발톱을 고양이는 무기로 사용하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서 발 사이에 숨겨 안 닳게 하지만 개는 그냥 내놓고 다녀서 많이 달리다보면 닳게 된다.
그래서 발자국에도 고양이과 동물 발자국은 발톱자국이 안 나지만 개과 동물 발자국에는 발톱 자국이 나게 된다.

고양이과, 개과, 족제비과, 곰과, 그리고 발굽동물의 발이 모두 다른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아마도 치열하게 진화해 왔을 나름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슴 뛰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고라니, 꽃사슴, 노루에 대한 이야기, 너구리와 오소리, 삵과 담비, 수달, 멧토끼, 청설모, 족제비에 대한 이야기들도 흥미로웠다.

여러 그림을 그려서 컴퓨터에 올리려고 했는데 이놈의 스캐너가 말썽이다. 아님 내가 기계치인가…(..) 나중에 따로 올려야지.

두번째로 양경모 선생님의 강의로 야생동물 카드 놀이를 했다.
기억력 카드 놀이를 했는 데 막판에 너무 잘 풀려 신이 났다. 카드도 너무 예뻐서 다 갖고 싶고.
이렇게 야생동물 교육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쉽고 자연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산에 갈 준비를 하고 맛있는 콩나물국밥을 먹고 화엄사에서 성삼재로 오르는 버스를 탔다.

와우, 우리 아부지가 160km/h로 달려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던 내가 버스가 뒤집어 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 엉엉엉. 옆에 거북이 선생님은 속이 안 좋아 보이셨다. 정말 빨리 내리고 싶었다.

드디어 성삼재에서 내려서 노고단까지 사람들이 깔아놓은 길을 따라 걸으며 '편하게' 올라왔다.

가는 길에 멧토끼 똥과 삵 똥을 발견했는 데, 어제 들은 강의가 떠오르면서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보았다.

멧토끼 똥은 정말 귀여운 것 같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다. 둥그렇고 좌우대칭적인, 색깔도 옅은 갈색.

인간의 길을 벗어나 출입금지 능선을 타고 야생동물 흔적 탐사에 나섰다.
우리 2,4조는 반달가슴곰을 닮으신 최천권 선생님을 따라 움직였다. 박그림 선생님도 함께 하셨다.
가슴 탁 트이는 능선의 언덕에서 바위에 올라 끝없는 숲을 바라보니 아, 정말 내가 산에 들어왔구나!라고 느껴졌다.

항상 나는 숲 속의 동물들이 어떻게 사는 지가 너무너무 궁금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비를 피해 앉아 눈을 깜빡깜빡일 동물들을 떠올리면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들어왔다.

삵 똥, 족제비 똥, 곰이 물다 버린 맥주 캔, 오소리 똥, 오소리 굴, 멧돼지 굴, 멧돼지 똥…

그동안 산을 다니면서 찾지 못했던 흔적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그 속에 눕고 엎드리고 촉감을 느끼고 바라보고 냄새 맡고…. 싶었지만 아직 뭔가 어색하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러지 못했다. 흐음.

최천권 선생님의 이야기와 동물 흉내도 너무 재미있었다.
멧돼지가 어떻게 조릿대를 꺾어 움막같은 집을 짓고 그 속에 사는 지,
어떻게 노루가 뿔질을 하는 지, 곰이 얼마나 영악한지, 오소리가 왜 굴 앞에 똥을 싸 놓는지.

점심을 먹고 능선에서 내려오기로 결정. 근데….

간디학교 다닐 시절 산을 너무 많이 다녀서 산 타는 게 그리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아마 난 인간의 편의에 익숙해져있었나보다. 너무 힘들었다ㅠ_ㅠ 다리가 후들후들.
길 아닌 길, 동물들은 네발로 다니니까 이 내리막이 익숙할까. 나는 다리에 너무 힘을 줘서 나중엔 가만히 있어도 후들후들.

산에는 등산화 신고 가는 것보다 보통 운동화 신고 가는 게 개인적으로 더 편하길래 운동화를 신고 갔는 데 정말 잘못한 일인 것 같아 후회막심했다. 정말 준비성이 없었다.

최천권 선생님은 자꾸 좀만 더 가면 된다고 하는 데… 아까도 한시간, 한시간 후에도 한시간.

그러다 계곡으로 내려오게 되었는 데 계곡에 발을 담그고 나니 정말 놀랍게도 힘이 났다.
이게 자연의 힘인가 싶을 정도로 정말 놀랍게 신기했다.

길이 나와 누군가가 “길이다!” 라고 소리를 치고 모두들 감격했을 때,
박그림 선생님이 “그렇게 길을 좋아하는 지는 몰랐네” 라고 농담하셔서 부끄러웠다.
아직 짐승이 되려면 멀었다, 멍멍이.

그렇게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1,3조와도 만나고 계속 걷다보니 큰 길이 나오고 화엄사 입구까지 쭈욱 걸어왔다.
혼자 걷기도 하고 다른 분들과 함께 걷기도 하고…

화엄사입구로 와서 좀 쉬다가 밥을 먹었다. 가위바위보로 남은 음식 먹기를 했는 데, 음, 난 많이 안 걸려서 다행이다. 크히히.

숙소가서 씻고 반창고 다시 붙이고… 무려 메디폼을 준비해오셔서 정말 감격. 아까워서 하나만 썼다.

발표준비를 하는 데 다들 정말 열심이셔서 놀랐다. 이런 일을 하면 주로 혼자 나서서 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정말 빠르고 재밌고 예술적으로 준비하셔서 나는 그냥 가만히 멀뚱멀뚱 있었다. 죄송.

예술적인 두 모둠의 발표를 끝내고, 이윤수 선생님의 강의가 있었다.
야생동물 교구 만들기 체험을 했는 데 그 전에 들려준 야생동물 흔적에 대한 이윤수 선생님의 그 놀라운 열정과 사랑이 나를 놀라게 했다.
산 꼭대기에서 예쁜 똥을 발견하고 혼자 내려오기도 벅찬 그 산을 똥을 싸놓은 돌까지 이고 오신 이윤수 선생님. 으아.
그리고 찍으신 사진들이 모두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 묻어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어서 더 눈길이 갔다.

여러 야생동물 교구도 구경했는데 똥 모형이라든지 발자국들은 정말 재미있고 또 신기한 교구였다.
물컹물컹한 똥들이 너무 귀여워보였다. 짧은 이야기를 마치고 직접적으로 교구를 만들어 보았다.
나는 너구리 발자국을 찰흙으로 찍어 만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또 가고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섬진강으로 갔다. 섬진강.
나는 도착하면 수달똥도 많고 발자국도 많고, 그리고 수달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야생동물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다. 아침이고 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가.

풀숲을 걷는 데 고라니가 쉬는 자리가 보였다. 풀이 눕혀져 있었는 데, 그 속에서 엎드려 있을 고라니를 떠올리니 폴짝폴짝 뛰고 싶다. 눕고 싶다. 풀숲이 너무 부드러워보였다.

강가로 가보니 생선뼈도 보이고, 무언가를 물고 간 듯한 수달 발자국도 보았다. 물에 나와 뒤뚱뒤뚱 걸는 수달, 물장난 치는 수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기 고라니와 함께 걸어간 어미 고라니의 발자국도 보였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걷다 보니 뛰어간 발자국도 보이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둘이 그렇게 뛰어 간 걸까. 어미는 아기의 보폭에 맞춰 가며…

섬진강을 나와 주변의 생태통로에 가 보았다. 그 곳 생태 통로는 꽤나 성공적이라고 한다.
아치형으로 된 터널같은 생태 통로였는데 가보니 발자국도 보이고 똥도 보였다.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어서 어떤 동물이 이동하는 지 볼 수 있었다.

최천권 선생님은 생태통로의 흙바닥에 난 발자국을 확인하고 빗자루로 지우면서 쓸어 내셨다.
그러면서 이 전에 빗자루 쓴 자국이 자신이 쓸어 내는 방향과 다르다며 다른 사람이 쓸었다고 투덜대셨다.
아무튼 이번에 난 최천권 선생님의 열렬한 팬이 되기로 했다.

근데 도로는 왜 그렇게 많이도 만드는지. 정말 답답하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지리산을 도로에 둘러쌓인 섬으로 만들까. 우리나라 1평방킬로미터 당 1킬로미터의 도로가 있다고 하던데.

이러저러 생각을 하면서 청개구리 선생님의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 왔다.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 데도 아침이라는 게 신기하다. 앞으론 일찍일찍 일어나야지.

조금 쉬다가 강당에 모여서 공지사항을 듣고, 잠자는 팬더 서명순 선생님의 동화책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의 동화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푹 빠져버리게 되었다.
나도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하지만, 그림은 정말 멋지다. 이야기도.
치로누프 섬의 여우 이야기, 어린 아이와 함께 자라다 결국 동물원에 가게 된 말썽꾸러기 곰 이야기.

그렇게 일정이 끝나고 화엄사 입구의 전주 식당에 가서 마지막 점심을 먹고

왕피천 선생님의 차를 타고 신혜 선생님이랑 꽃마리 선생님이랑 거북이 선생님이랑 같이 갔다.
나는 인월에서 내려서 인월 터미널에서 함양으로 다시 대전으로, 그리고 공주로 왔다.

오는 내내 정말 깊은 기쁨이 차올랐다.
지리산에서의 2박3일. 너무너무 즐거웠다.
왕 만한 가방을 메고, 온 팔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혼자 걸어 다니는 여자애를 보고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 보는 데 그 것조차 너무 재미있었다. 으하하하. 웃고만 싶다.

좋은 숲, 그 속에 숨은 동물들,
배움과 만남,
가슴 따뜻함,
정말 좋은 사람들,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핸드폰을 끄고 컴퓨터, TV에서 벗어나 숲이 들려주는 흔적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숲의 소리들,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숲의 나무와 흙과 동물들 흔적의 냄새를 맡고,
그리고 두 발로, 때론 네 발로 걸으니 으하하 해피 바이러스가 온 몸에 퍼진다.

다시 도시로, 사람 사는 곳으로 오니 음악소리와 차소리가 시끌벅적하다.
빽빽한 산 속, 가슴 벅찬 봉우리, 힘을 주는 계곡, 몸을 숨길 풀숲과 갈대밭이 벌써부터 그립다.
멋부리고 다니는 사람들, 깔깔 웃는 사람들…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질까.

내가 드디어 짐승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