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라잡이들과 설악에 들어

2008년 8월 18일 | 공지사항

이른 새벽 잠결에 들리는 빗줄기 소리에 눈이 번쩍 띈다.
아- 가벼운 탄식과 함께 오늘의 일들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산양의 삶터를 찾아 산길을 오르는 것도,
산양의 삶터에서 몸 비비며 하루 밤을 보내는 일도
아스라이 사라지는 까닭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창밖의 어둠이 걷혀 오고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빗줄기에 흥건히 젖은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진다.
물방울 하나에 무너지는 기대와 실망을 읽어낸다.
우리들이 마음먹은 대로 자연이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마음을 다독이며 기다리는 것,
그것이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산에 드는 모습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앙금처럼 남아 흔드는 아쉬움을 모두 털어 버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쳐다보는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빗줄기만 쏟아낸다.
하늘에서 뿌리는 빗방울 속에 생명을 기르는 힘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음을 깨닫고 나면
앙금처럼 남아있던 아쉬움은 덜하리라.

돌깔기와 목재데크를 벗어나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서는 숲길로 들어섰다.
아쉬움으로 들어선 길골은 빗물에 젖어 나뭇잎마다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슬떨이처럼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척척하게 휘감기는 느낌이 온몸을 적신다.
길게 이어지는 오솔길에서 눈은 바쁘게 움직이며
짐승들이 남긴 똥과 흔적들을 찾는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짐승들도
바위 밑에 웅크리고 앉아 빗줄기가 멈추기를 기다릴 것이다.
이런 날 산에 들면 나도 바위 밑에 들어가 하루 종일 침낭 속에서 뒹군다.
짐승들의 쉼을 깨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졸다가도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살펴야 하는
긴장된 삶 속에서 잠깐의 쉼은 얼마나 달콤한 위안이 될까.

길은 이어지고 화전민들의 오랜 삶터에 닿았다.
작은 돌담에는 푸른 이끼가 두껍게 앉았고
세월은 빠르게 흐르며 사람들의 흔적을 자연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비 그치고 햇볕이 따사로운 날에는
돌담 위에 뱀들이 똬리를 틀고 앉아 몸을 말리는
이곳까지 찾아 들어 밭을 일구고 약초 뜯으며 살았던 그들은 누구일까?
어떤 이들이기에 이곳까지 흘러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대처의 불빛을 등지고 호롱불에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했던 이들의 삶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저기 쌓인 돌무더기는 돌투성이의 척박한 땅을 일구느라 허리가 휘었을 이들을
떠올리게 하고 손마디는 나무옹이처럼 굵고 거칠게 만들었을 것이다.
거칠고 두툼한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부끄러움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곱고 매끄러운 손이 주는 약하고 쉽게 부서질 것 같은 느낌에서
나는 얼마나 크게 벗어나 있을까?

돌담 안에 자리 잡았을 창고에는 옥수수와 약초다발이 걸렸고
장날 약초꾸러미와 바꾸어온 쌀이랑 자반 한손이 높게 얹혀 있었을까?
다래순, 곰취, 얼레지 말려 묵나물 만들어 겨우살이 양식으로 매달아 놓고
작은 텃밭에 심은 배추, 무 뽑아 담근 김장독이 묻혀 있었을까?

아름드리 소나무 눕혀 쪼갠 송판으로 지붕을 덮은 너와집에
진흙덩이 문질러 벽을 만들고 바람을 막았다.
요즈음 황토집이 유행을 이루고 오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지만
산골의 삶속에서는 자연이 마련해 주는 것으로 밖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삶이었고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는 삶이었다.

그래도 마음속에는 꿈이 영글어 갔다.
이번에 큰 것 한 마리 잡아 이밥에 고기반찬 배터지게 먹어 보리라.
아이들 꼬지지한 옷 벗기고 때때옷 한 벌 입혀 보리라.
먹 고무신 팽개치고 하얀 운동화 한 켤레 신겨 보리라.
거친 마누라 얼굴에 구르무 바르고 입술연지 찍어 발라
처녀 때 만났던 모습 돌이켜 보리라.

어스름 땅거미가 지고 달이 산등을 타고 오르면
고단한 몸은 마음처럼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든다.
드르렁거리며 코고는 소리가 창호지 문밖으로 흘러나가고
달빛은 출렁이며 숲을 어루만진다.
호롱불 아래 터진 양말과 뜯어진 바짓단을 깁는
아낙의 그림자 성긴 문창살에 어른거리며 밤은 깊어간다.

달빛이 쏟아지는 숲 속에서 집을 찾아드는 짐승들의 움직임이 부산하고
젖을 보채는 어린짐승들의 울음소리 멀리서 들린다.
어두움을 살아가는 짐승들의 낮은 소리들이 어울린다.
소리 없이 날아와 작은 쥐를 낚아채는 올빼미,
어둠 속에서 눈망울 더욱 커지는 살쾡이의 조용한 발걸음,
푸드득거리며 잠을 설치는 작은 새들의 소리,
낙엽을 밟고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담긴 조심스러움,
밤은 낮처럼 생명의 모습이 아니라 소리로 가슴 속을 파고든다.

화전민 집터에 서서 빗방울을 맞으며 생각에 빠져 헤어나기 어려웠다.
작은 꿈도 이루기에 힘들었던 그들의 삶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이 나라를 이끌었던 개기름 번드르 하게 흐르는 위정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백성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고
위정자들이 내돌리는 감각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에 마음을 뺏긴 우리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쏟아지던 빗줄기가 후두두 거리며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나뭇잎을 바라볼 때 눈을 잡아끄는 파란 하늘,
먹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사라진다.
이내 먹구름이 덮이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질컥거리는 오솔길 따라 오르다 화전민이 일구던 밭으로 들어선다.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쌓였고 나무들이 자리 잡아 숲으로 바뀌고 있다.
삶을 이어가던 이들 모두 사라졌지만 샘은 여전히 맑은 물이 흐르고
이제는 많은 짐승들이 목을 축이러 드나들고 있다.
늘 햇볕이 들어와 풀밭을 이루는 이곳에는 짐승들의 똥이며, 발자국이 널려 있다.
겨울이면 추위를 견디려 따뜻한 햇볕과 먹이를 찾아 모여 들었고
눈밭에 쉬었던 둥근 자리며 뒤적이던 자국이 흩어져 있다.

빗속에서 아침에 숲을 뒤적이며 지나가던 멧돼지가 싸놓은 똥이 번들거리며 놓였다.
“와- 멧돼지 똥이다!” 똥이 그렇게 반가운 까닭은 무엇일까?
나뭇가지에 똥을 찍어 냄새를 맡는다.
하나같이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감는다.
이미 냄새는 가슴 속으로 들어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깊이 새겨 졌다.
그렇게 짐승들의 세상으로 한발씩 다가서고
어느 날인가 스스럼없이 나뭇가지가 아니라 코를 들이밀고
숨을 깊이 들여 마시듯 냄새를 맡는 스스로를 보고 화들짝 놀랄 날이 올 것이다.
그 때 바라보는 짐승들의 세상은 우리들과 멀리 떨어진 세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짐승들의 세상이며
짐승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들의 세상임을 깨닫는 때일 것이다.

이끼가 잔뜩 덮인 나무 등걸이 뒹굴고 다래덩굴이 나무를 휘감아 오르는 숲 속에서
비오는 아침, 먹이를 찾아 숲 속을 헤매고 있는 멧돼지의 모습이 떠오르고
샘가에 싸놓은 환약 같은 고라니 똥에서
고라니의 맑은 눈동자 속에 비친 숲의 모습은 어땠을까? 떠올려 본다.
어렴풋하게 드러나는 짐승들이 다니는 길은 부드럽고 편안하다.
그 길을 찾아 오른다.

길 옆 풀 섶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전핀이 단단하게 꽂힌 세열수류탄이 빗물에 검붉은 몸체를 드러내고 있다.
목숨을 생각하며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쥐었을 수류탄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이 생각했을 세상이 지금 이루어졌을까?
목숨 바쳐 지켰던 이 나라는 지금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로 가득할까?
땀 흘려 일한만큼 얻을 수 있는 세상일까?
서로를 바라보며 보살피는 세상일까?
짐승들도 더불어 살아가는 대동세상일까?
그만————
생각의 끈을 자른다.

비오는 숲 속에서 쭈그려 앉아 주먹밥을 먹는다.
맛있다고 떠들어대며 먹는 주먹밥은 주먹밥이 아니고 생명을 이어가는 힘이다.
노루가 숲 속에서 뜯는 풀이나 우리들이 먹는 주먹밥은 같다.
주먹밥 속에는 햇볕이 들어 있고,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스며있으며, ,
내가 세상을 살아갈 만 한곳으로 여기게 하는 사랑이 담겨 있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나누어 먹고 까르르거리며 쉬었다.
멀리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짐승들의 눈총이 따갑게 와 닿는 것도 모른 채 그랬다.
짐승들아 미안하다. 무례함을 용서해 줘!
다음부터는 조용히 드나들게, 약속해!

빗줄기 잦아들고 산길을 내려간다.
아쉽다.
내려가며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먼발치에서 내려가는 우리들을 배웅하는
고라니와 멧돼지가 보이기라도 하듯 자꾸 돌아보고 손을 흔들어 본다.

아쉬움은 그리움을 안고 커다란 꿈을 꾸게 한다.
다음에는 더 깊이 짐승들의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꿈꾸게 한다.

수렴동골에 넘치도록 물이 흐른다.
설악산어머니 품속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의 몸을 적시고 스며든 빗방울들이 모여
초록빛 내를 이루고 물못이 되고 폭포가 되어 아우성치며 쏟아진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우성속에 생명들의 아픔이, 슬픔이, 사랑이, 기쁨이 뒤섞여
가슴 속을 파고들어 하나하나의 모습으로 바뀐다.
산양아!
멧돼지야!
노루야!
고라니야!
너구리야!
삵아! ——————————————————–
모든 생명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다.
오직 그리움을 가슴에 담아 생명들의 흔적을 찾고
너희들이 쉬었던 자리에 몸을 누인다.

왕피천, 꽃마리, 돌고래, 파랑새, 금강송, 거북이, 자연사랑, 얼레지, 풀냄새, 멍멍이,
회화나무, 말똥가리, 안개소년, 참새, 히어리, 청개구리, 파랑, 채송화, 보리, 나무늘보,

새삼스럽게 불러본다.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희망이 움트고 싹이 돋아난다.
모든 일을 마치고 헤어진 뒤에도
늘 그리움으로 불러볼 이름이 되기를 빌어본다.

그 날 설악으로 다시 들어와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고 마음이 가벼워졌던 것은
미안함과 아쉬움이 덜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 날도 나는 대승골에 들지 못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연구소에 틀어박혀 이글을 썼다.

아우름지기
작은뿔 박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