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피천 일정 후기

2009년 6월 4일 | 야생동물길라잡이

왕피천 일정 후기

 

“ 바스락! 소리를 향해 살금살금 몸을 틀자 나를 빤히 보는 어미 노루와 눈이 딱 마주쳤다.

심장이 벌렁벌렁, 이 느낌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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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발로 길 각오를 하고 참가신청서를 낼 때 꿈꿨던 장면입니다.

근데 그 깊은 산속을 삼일 내내 걷고 기었지만

마주친 네발동물은 집 뒤 박박산에서도 볼 수 있는 청설모뿐이었습니다. 

산양이 사는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릴 땐 속으로 눈물을 한바가지나 쏟았지만

해초냄새(혹은 생선비린내)나는 수달똥,

지난해 열었던 마른 열매를 먹고 싼 오소리똥,

톱밥 뭉쳐놓은 것 같은 멧토끼똥,

최고의 비경에 자리잡은 산양똥,

등등의 똥똥똥똥.

그들의 발자국,

먹이자국, 

앉아 쉬었던 자리,

그 자리에 남은 가는 털,

진흙목욕자리

오소리굴,

그리고 밤껍질같이 가시붙은 가죽만 남고 온몸을 파먹힌 고슴도치를 보고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흔적의 힘은 강력했습니다.

산양은 내가 보고 있는 흔적을 지나,

지금 어딘가에 정말 있을 것이고,

이 흔적은 거기로 향하는 시작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요.

 

친구가 옆에서 방귀만 뀌어도 냄새난다고 타박을 할 텐데….

그 많은 똥들에 코를 박으며 냄새가 이러쿵저러쿵…..

그것도 모자라 손으로 헤집으며 이러쿵저러쿵….

미식가들도 음식을 앞에 놓고 우리들처럼 치열한 감정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흔적을 따라 걷다가 어두워지면 잠을 자고, 환해지면 다시 일어나 걷고.

빛을 따라 생활하는 게 그렇게 좋았던 걸보면 서울선 어지간히도 자연스럽지않은 생활을 했던가봅니다. 

 

비가 와서 달, 별이 보이지 않는 산속의 어둠은 절대적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밤 중 요의가 느껴져도 혼자 나서기가 좀 그래서 참고 참았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안돼서 헤드렌턴을 주섬주섬 찾아 머리에 쓰고 길을 나섰어요.

그런데 걷다보니 헤드렌턴 끈이 뚝 끊어지며 불이 꺼졌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일행이 있는 곳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첩첩산중에 혼자였거든요.

근데 조금 지나니 길이 보이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렌턴을 켰을 땐 불빛이 비치는 곳만 보였지만

불이 꺼지니 켭켭산이 보이고, 저 멀리 희멀거니 난 길이 보이고, 계곡이 보이고….

신기했습니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라고 흔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준 야생동물들,

그들의 이야길 들을 수 있게 우릴 정성껏 이끌어주신 박그림 선생님,

재밌는 강의로 우릴 사로잡으신 최현명 선생님

그 아름다운 길로 우릴 안내하신 왕피천,

먼 길을 함께하면서 서로 챙겨주고, 웃겨주며 마음을 나눈 동무들.

그리고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항상 음으로 양으로 애써주신 맑은샘, 코끼리.

그립습니다.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과 글을 보며

그리고 이글을 쓰며

초식동물이 되새김질하듯 기억을 되새김질하니 행복해집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