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죠자연보호구 소회(3)

2008년 11월 12일 | 야생동물길라잡이

 

라죠자연보호구 소회(3)

                                                                               

너무 깊은 잠이였다. 희미한 여명 속에 인나박사의 소프라노 음성에 모두들 정신이 퍼뜩 든다. 아뿔싸..! 시간이 벌써 07시5분이다. 급히 여장을 꾸리고 식당으로 달려가니 인나박사가 육로로 가는 길이 지난 폭우때 유실 되어 배편으로 일정이 변경되었으니 서둘러 달라고 하신다. 먼저 와서 식사중인 숙녀분들의 표정들이 뾰로퉁하다. 아마도 많이 소리쳤나 보다. 그렇게 식사를 하는데 영준쌤이랑 안개가 아직 도착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짐들은 벌써 차량에 실렸고.. 모두들 차량에 탑승하려 하는 가운데 영준쌤과 안개가 저기 나타난다. 몽롱한 두 분의 등 뒤로 그물코처럼 딸려오는 지난밤의 수많은 별자리들.. 간밤의 황홀한 축제를 떠 올리며 슬며시 웃음 짓는데, 인나의 소프라노 음성이 한층 톤이 높아진다. 하지만 어디 영준이 그리 만만하던가..! 눈을 크게 뜬 채 뭐시라.. 뭐시라 하니 인나가 결국 웃고 만다. 개인적으론 올레니아 보트에서의 아름다운 일출을 기대하였지만 아쉽게도 차량 안에서 해맞이를 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어떠랴!

이곳에서는 어디든 흙먼지를 달고 달린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산뜻한 건물들과 포장이 잘 된 도로가 나타난다. 라죠 근처의 가장 큰 도시인 프리오 오브제니아. 인나박사와 몇 분이 출항신고서를 작성하러 내린 사이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들과 우리 일행들은 손으로 인사를 나눈다. 조선업을 주업으로 하는 프리오 오브제니아는 곳곳에 열악한 건물과 폐기된 선박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우중충한 도시 분위기임에도 행인들의 분위기는 사뭇 밝아 보인다. 행복하다는 감정은 결코 문명의 진보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신고서를 작성한 후 배를 타는 포구로 가는 길은 몹시 열악한 비포장 길이다. 그렇게 도착한 포구는 몹시 허름해서 낙동강 하구의 작은 포구보다 훨씬 초라해 보인다. 허나 목도로 만들어진 포구의 한 곁에 폐기되어 있는 잠수정들은 러시아의 해양 기술력을 보는 것 같아 일견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포구 곁에 위치한 허술한 인가에서 나이 드신 러시아 할머니가 아침 땔감을 장만하시는지 연신 도끼질을 하시는데 몹시 힘겨워 보인다. 그래도 얼마 있지 않아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니 훨씬 마음이  나아진다. 그렇게 포구에서 서성이며 아침햇살을 기다리고 있자니 우리 일행의 짐을 실은 차량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른 분들의 짐은 다 있는데 참새 것만 없다!! 살짝 혼란해 지는 마음.. 허나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으로 도착한 영준쌤이 탄 차량에 참새가방이 들어 있었다. 호호. 0910분 우리를 태운 러시안 보트는 소도시에 걸맞지 않게 몹시 귀티가 나는 고급스런 레져용 선박 이였고, 우리는 갈매기들의 화려한 배웅을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Proselochngi Cordon을 향해 출항하였다. 항구에서 멀지않은 곳에 민물가마우지 무리들이 암반위에 나란히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어느 새 우리를 태운 배는 바다 한가운데로 달려가고 육지 쪽 해안가로는 기암괴석 군상이 연이어 나타난다. 코뿔소를 닮았는가 했더니 사람의 형상도 나타나고 금방이라도 거칠게 일어나며 포효할 것 같은 맹수의 모습도 보인다. 우리나라 해안이라면 갖가지 이름을 붙여 놓고 상품화에 나서고도 남을 만큼 멋진 기암괴석들이다. 1000시 어느새 배는 산양이 서식하고 있는 해안암석지대로 진입하고 있고 모두들 목을 빼고 해안 암석을 바라본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모두들 기린목이 되어갈 1045분경.. 선박의 바로 옆에서 밍크고래가 솟구치고 모두들 일제히 탄성을 내 지른다. “아이고.. 미치겠네”  선박의 속력을 늦추고 최대한 오래 고래를 마음속에 담고자 애를 써 보지만, 무심한 밍크는 유유히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이때 선실 안에 있던 얼레지가 노란 바람막이 상의를 입은 채 선박의 후미로 나오는데, 어디선가 벌 한 마리가 날아와 얼레지 곁을 맴돈다. 아마도 노랑색의 바람막이 상의가 큰 꽃잎으로 인식되었나 보다. ‘에잉..속았잖아. 침이나 한방 쏘아줄까?’ 1105분 알렉산더박사의 요청으로 배가 급격히 속도를 늦춘다. 아마도 산양의 주 서식처 절벽인 듯 한데 산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때 선박의 후미에서 같이 앉아 해안절벽을 바라보고 있던 알렉산더박사가 손으로 한곳을 가르키며 ‘베어,,베어’ 라고 소리치니 모두들 일제히 해안절벽으로 시선을 향하는데.., 그곳에는 잘 생긴 반달가슴곰 한 마리가 여유롭게 암반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들 ‘우와..우와’ 얼마를 그렇게 입을 벌린 채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또 찍고 있자니, 우리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반달가슴곰이 슬그머니 계곡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간다. 일행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하다. 멀어져 가는 반달가슴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먼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지구는 바다의 행성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 바다의 검푸른 물결을 바라보자니 경외심을 가지고도 남을 만큼 깊은 두려움이 밀려온다. 1115분 짙은 청록색 바다를 여전히 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밀리터리룩 복장을 한 남녀가 탑승한 수상고무보트가 우리선박을 향해 다가온다. 순간.. 긴장을 하는데 알렉산더 박사와 반갑게 수인사를 나눈다. 우리가 묵을 숙영지에서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분들이다. 수상보트는 우리선박을 선회하더니 일정한 장소로 선박을 인도하여 우리 일행을 차례로 태워 해안가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1130분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안사구가 마음을 들뜨게 하는 가운데 야생동물길라잡이 길동무들의 ‘타친코베이’ 상륙작전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 멀지않은 기억 속에 자리한 Bob Ross 선생의 ‘그림을 그립시다’ 라는 미술프로그램을 기억하는가? 우리 길동무들이 내린 그곳은 Bob Ross 선생의 붓길속 오두막이 울고 갈 만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북풍을 막아주는 뒷산을 배경으로 양지바른 신갈나무 숲속에 다소곳이 자리한 목조오두막은 너무나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그 자체였다. 모두들 정신을 내어놓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온갖 폼을 잡고 걸어간다. 길을 가다 땅바닥에 엎드려 향기를 맡는 길동무.. 소로를 가다 키 작은 야생화와 한참을 눈맞춤 하는 길동무.. 아아..! 그 길은 한달음에 달려가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야생의 소로였고, 거친 영혼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율감이 격량처럼 밀려오는 야생의 그 길을.. 불에 덴 듯 바라보던 길동무 몇몇은 해안을 바라보며 드러누워 버렸다. 그렇게 라죠 자연보호구의 소경에 마음을 베어 뒹굴뒹굴 거리다 나도 한껏 여유로움을 부리며 오두막으로 향한다. 이곳 보호구역내의 코르돈은 주방을 담당하는 상주인원 1명과, 순환근무를 하는 인스펙트 4분이 근무를 하며 보호구내의 정해진 구역을 순찰 감시활동과 야생동물의 활동을 기록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방명록을 멋지게 작성하고 통시(?)도 다녀오고, 오두막벽에 붙어있는 꽃사슴 뼈들도 살펴보고 있는데 어디서 잡아왔는지 영준쌤이 먹구렁이 한 마리를 손에 들고 있다. 모두들 달려가니 먹구렁이란 놈이 이리저리 여러 사람 손을 옮겨 다니며 기꺼이 모델이 되어준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인스펙트 한분이 어디서 자루를 한 개 가져오더니 까치살모사 암수를 차례로 꺼집어 내어 자랑을 한다. 능수능란하게 뱀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여기저기서 촬깍.. 촬칵..! 우리가 너무 좋아해서일까? 다음엔 누룩뱀이 등장하여 초지를 기어다닌다. 즐거운 한때는 점심시간으로 이어지고 소세지와 빵 요거트, 꽁치캔. 그리고 특별히 우리일행이 위해 쌀밥이 나온 시간은 1310분이였다. 그렇게 맛난 식사를 마치고 일행들은 삼삼오오 해변으로 뛰어나간다. 해변 나무벤치에 앉아 있자니 멀지 않은 사구에 여성 인스펙트 한분이 강아지와 함께 앉아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상념을 저리 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다를 바라보는 눈길이 애잔하다. 촬영담당인 쉬리쌤을 포함한 길동무들은 끼리끼리 모여 여기저기 열심히 야생흔적을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왕피천과 참새는 통나무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느긋한데, 왼편으로 오두막을 끼고 돌며 인간을 포함한 뭇생명들의 생명수 역할을 하고는 바다로 향해 흘러드는 냇가의 위세가 제법 당당하다. 그렇게 얼마를 앉아 있었을까? 영준쌤과 함께 야생동물 흔적을 탐사하던 팀에서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하곤 그 뒤를 밟고 있다. 해안의 고운 모래위엔 호랑이를 비롯한 꽃사슴 발자국이 지천이였다. 쉬리와 안개와 왕피천과 참새의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던 알렉산더 박사의 말에 따르면 호랑이 암컷의 발볼 너비는 약 9.5㎝이며 숫컷은 11㎝ 안밖이 된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 발밑에 지천으로 찍혀있는 호랑이 발자국은 암컷의 발자국이며 하루전인 어제 이곳을 지나간 듯 하다고 설명해 주신다. 그래서 자기 영역을 순회하는데 보통 일주일이 걸리는 것을 예상하면, 우리 길라잡이일행은 당신처럼 호랑이를 만날 멋진 기회는 잃어 버린 듯 하다고 웃으신다. 반듯한 걸음걸이로 그리 급할 것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나지막한 신갈나무 숲에서 나와 해변을 산책하듯 걸어 왼편 해안 암석뒤로 돌아 사라진 시베리아 호랑이의 여유로운 뒷태가 눈앞에 저절로 그려진다. 흔적을 쫒아 우리도 왼편해안으로 나아간다. 초록빛 바다는 티 없이 맑고 아름답다. 1630분 그 아름다운 수면으로 물범 한 마리가 우리를 의식하지 않고 유유히 유영하며 우리를 반긴다. 눈을 돌려 어디를 보아도 이토록 완벽하게 산과 바다가 보호된 곳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경탄한다. 1800분 알렉산더 박사를 따라 8명의 길잡이들이 보호구 내의 산양을 보러 길을 나선다. 절벽을 오르내리고 험로를 헤치며 나아가며 관측지점에 도착한 시간은 1920분경.. 망원경으로 여기저기를 주의깊게 살펴보지만 어디에도 산양은 보이지 않는다. 해안가 바위에 기댄 알렉산더 박사의 얼굴엔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흰꼬리수리 유조가 유유히 날아가는 절벽엔 암석들이 덩어리 채 떨어져 있고, 그 거친 암석들은 파도에 끊임없이 단련되어 둥근 자갈돌이 되어간다. 산양의 관측에 실패하고 돌아서는 일행의 발걸음들이 짙어가는 어두움과 함께 힘겨워 보이는데,  2030분 오두막이 보이는 초지로 들어서니 모두의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두막을 향해 걸어가는 일행의 실루엣 뒤로 어둠이 내린 신갈나무 숲속에서, 일렁이는 바람타고 시베리아 호랑이가 슬며시 나타날 것만 같다. 아홉시가 지난 깜깜한 시간.. 오두막을 끼고 도는 개울에는 문명의 허물을 미련없이 벗어 던지는 참새 한 마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