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성공회대 김찬호

2015년 6월 22일 | 녹색소식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글 김찬호

소음의 악순환

도심지를 오가며 엠피쓰리를 듣다가 그대로 꺼놓고 집에서 다시 들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소리 크기는 그대로인데 귀가 따가워 도저히 들을 수가 없다. 청각은 묘해서 똑같은 음량도 주변이 얼마나 시끄러우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낀다. 소리의 강약을 느끼는 것은 고막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들어온 신호를 최종 접수하는 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깥에서 겨우 들릴 만큼 작았던 소리도 조용한 새벽에 전원을 넣는 순간 소스라치며 황급히 볼륨을 줄이게 된다. 한국 대도시의 소음 수준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우리 도시는 늘 시끄럽다. 휴대폰 벨소리나 통화 음성이 지하철 같은 폐쇄 공공장소에서 크게 들리고, 버스에서는 운전사가 틀어놓은 방송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서울에서는 교통안내방송 중간마다 상업광고가 끼어든다. 일정 구간을 지날 때마다 위성 신호를 받아 자동으로 방송되는 것인데, 라디오 광고와 달리 목소리 색깔과 문구가 매우 선동적이다. 그 밖에 우리 귀를 혹사하는 소리는 끝없이 나열된다. 교통 정리하는 아저씨들 호각소리, 아가씨들이 계단을 내려올 때 바닥에 부딪히는 하이힐 소리, 지하철 상인들 호객 소리, 시위대 스피커 소리, 휴양지 폭죽과 고성방가… 한국인들은 조용한 것과 원수진 듯하다. 아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언성은 권력처럼 작동한다.

시끄러운 환경에서 사람들 목소리는 더욱 커진다. 소음은 더 큰 소음을 낳는다. 소음이 점점 커지는 것은 도시의 인구 밀도와도 관련이 있다. 사람과 자동차가 늘어나면 그만큼 소음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심리 차원이다. 어느 동물이든 제한된 공간에 적정 수준을 넘는 개체 수가 서식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공격성이 높아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쉽게 내고 목소리가 거칠어진다.

소음이 심한 환경에서는 동물들도 악순환의 굴레에 빠져든다. 시골의 매미 소리를 들어보면 소리의 높낮이에 변화가 있어 뭔가 아기자기한 리듬감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도시 매미들은 발악하듯이 하염없이 굉음을 내지른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주민들이 민원을 넣고 때로 약을 치기도 한다. 그렇듯 시끄러워진 까닭은 주변이 시끄러워 웬만큼 큰 소리로는 암컷을 유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목소리 큰’ 놈들만이 짝짓기에 성공하고, 거기에서 ‘목청’ 좋은 새끼들이 태어난다. 시끄러운 도시 환경에서는 매미들의 발성 능력이 결국 적응 가치를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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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속에 자라나는 창발성

‘선생님도 사람이다. 성직자도 사람이다. 엄마도 사람이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타인을 배려하도록 기대되는 직분이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도 인간으로서 약점과 한계가 있음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사람도 동물이다’라는 표현을 생각해본다. 인간은 정신과 인격의 고결한 힘으로 다른 동물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세계를 만들어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역시 몸을 가진 동물로서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도 엄연히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그 환경을 바꾸거나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도시는 그러한 인공 환경이 절대 비중을 차지하는 삶의 조건이다. 그런데 잘 살아보겠다고 건설한 문명이 생명의 본성을 거스를 때가 많다. 소음도 그 부작용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소란한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무심코 넘겨버린다. 하지만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영향을 덜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웬만큼 시끄러워도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증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란한 환경에서는 상대방에게 잘 들리게 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거기에서 수다를 떨거나 논쟁은 할 수 있어도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다. 사람은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기 때문이다. 남모르는 고민, 견딜 수 없는 슬픔, 달콤하고도 겸연쩍은 사랑, 눈물겨운 고마움 같은 것을 고함치며 털어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해도 시끄러운 환경에서는 상대방이 차분하게 경청하기 어렵다. 우리는 서로의 심경을 섬세하게 헤아리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몹시 외롭다. 휴대전화가 끊임없이 울리지만 언제나 허전하다.

요란한 생활세계는 개인과 사회의 생산성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지식 정보사회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고, 그 집중력은 고요함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평온한 가운데 상상력과 창의성은 꽃을 피운다. 그러한 마음의 에너지 없이는 과학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조앤 에릭슨은 ≪감각의 매혹≫이라는 책에서‘창발성inventivesness없는 과학은 단순한 테크닉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오감으로 세계와 드넓게 교섭하고 자신의 느낌을 청아하게 주시할 수 있을 때 사물에 대한 이해도 명징해질 수 있다.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정승조靜勝躁 … 청정위천하정淸靜爲天下正’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사람에게는 고요함 속에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날마다 일정한 만큼 있어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 진정한 자유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평온함에서 마음의 질서를 세우고 몰입(flow)을 통한 최적의 경험(optimal experience)에 이를 수 있다. “위대한 일은 조용하고 단조로운 생활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버트란트 러셀의 이 말은 오늘 새삼 다시 들린다.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 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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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님은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이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과 교육학을 강의하면서,‘교육센터 마음의 씨앗’ 부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돈의 인문학», «사회를 보는 논리», «모멸감»을 비롯해 다수가 있으며, 최근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옮겼다.

* 이 글은 2015년 6월호 특집 <지구의 소리> 글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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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출처 : 월간 작은것이 아름답다 http://jaga.or.kr/?p=6209